문성공 후세손 일채(一采)

-17세손, 문성공파종회 사무처장-

1. 문성공의 생애

 

문성공 인지(麟趾)께서는 1396년(태조 5년)∼1478년(성종 9년)까지 조선조 초기의 문신(文臣)이며 대표적인 학자이다. 호는 학역재(學易齋) 시호(諡號)는 문성(文成)으로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지내신 흥인(興仁)의 아드님이시다.

1414년(태종 14년) 1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오르셨으며 1475년(성종 6년) 원상(院相)으로 물러날 때까지 60여 년 동안  태·세·문·단·세·예·성까지 7朝에 걸쳐 봉직하였다. 조선왕조 성립시기 왕도의 확립과 관료제도 구축 및 문화기반 조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관직에 나가 사헌부감찰, 예조좌랑에 올랐고, 태종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며 세종 때 고명(顧命)으로 집현전직제학 부제학 등 벼슬을 지내면서 성삼문, 신숙주, 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후 이·공·예·병·형의 5판서를 거쳐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조선왕조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세종대왕의 업적에 크게 공헌하였다. 왕의 총애와 신뢰를 받고 요직에 두루 기용되면서 집현전의 운용, 한글창제 및 반포, 세제개혁, 서적편찬 등으로 주로 민족문화를 집대성하는데 공헌했다.

 

세조朝에 있어서는 왕권의 어려운 시기에 계유정난의 대책참결, 경국대전편찬 참여 등으로 왕권의 확립과 관료정치의 확립 등 제도정비에 공헌하였다. 계유정란(癸酉靖難)때 좌의정에 오르고 공신(功臣)의 칭호와 함게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영의정이 되어 국사를 정성껏 보살폈다. 그러나 세조의 숭불(崇佛)을 반대하다가 석성으로 유배된 일이 있었고 얼마 안 되어 수환 복귀되었다. 성종 때는 순성명량경제좌익공신의 칭호를 받았으며 국가의 원로대신으로서 국정을 총괄하는 원상(院相)의 자리에 올라 권신과 공신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워낙 학문이 해박하여 모든 것에 거칠 것이 없었으며 세종의 천문역산(天文曆算)의 뜻을 받아 대소간의규표(大小簡儀圭表) 및 흠경보루(欽敬報漏)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때가 됨에 조정의 극진한 우대에도 극구 사양하고 물러나니 후학들의 존경을 받았다.

 

2. 문성공의 저술업적

 

공은 정치가로서 뿐만 아니라 문인, 문필가, 저술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공이 저술한 책속에는 그의 문필, 문학사상, 학문 등을 엿볼 수 있으며 그 수많은 책들과 저술들 중에서 우리의 정치, 역사, 문화, 사회사상에 크나 큰 영향을 끼친 것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1434년(세종 16년:39세), 이조참판과 예문관제학을 역임하실 때 세종의 명에 의하여 중국의 통사(通史)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우리 정치의 귀감으로 삼고 후세의 훈육(訓育)자료로 삼기 위하여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편찬토록한 책이다.

 

   (2) 사륜전집(絲綸全集)

        1442년(세종 24년:47세), 예문관 대제학에 제수되고 집현전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이때 세종의 역사편찬사업의 일환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중국의 진한(秦漢)으로부터 원명(元明)에 이르는 제고(制誥) 소칙(召勅) 등을 집록(集錄)한 것으로 중국의 법률로서 편찬된 사항을 국내 정치의 참고자료와 억울한 백성의 형정(刑政)에 반영하기 위하여 편찬한 책이다.

 

   (3)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세종이 농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천문기계 제작과 함게 천문역법에 관하여 관심이 컸으며 천문의 변화에 따라 왕정의 길흉도 관계가 있다는 생각으로 이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였다. 이에 문성공께서는 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과 明나라의 대통력(大統曆)을 개정하여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찬집하였고 후에 이순지, 김담 등이 회회력(回回曆)을 참작하여 칠정산외편(七政算外便)을 만듬으로써 조선의 향력(鄕曆)으로 사용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4) 치평요람(治平要覽)

        1445년(세종 27년:50세), 의정부 우참찬을 지내고 병조판서도 역임하면서 예문관과 집현전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이때 정인지, 이석형(李石亨) 등이 세종의 명에 의하여 편찬한 정치서적이다. 역대의 사적에서 정치인에 거울이 될만한 사실을 발췌 편찬한 책으로 중국의 周나라에서 元나라까지, 우리나라 기자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 중에 국가의 흥망성쇠, 군신관계, 윤리도덕 등 권징(勸懲)할만한 사실을 뽑아 후세 자손들에 귀감으로 삼게한 책이다.

    ※ 이 책은 1516년(중종 11년:古活字版, 正德 11년 朝鮮刊)에 간행된 150券 129冊이 日本「尾張藩御文庫 中國 朝鮮의 文化」출품 목록에 들어있다. 이것은 공의 저술 책자 中에서 가장 오래된 현존본으로 보아지며 우리 문중은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반환, 회수 방안을 강구해야 할 과제라고 사료된다.

 

   (5)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1445년(세종 27년:50세), 자헌대부 의정부우참판, 집현전대제학, 춘추관사를 겸임하였다. 모든 왕조는 건국자에 대한 신화, 설화, 전설 등이 있는데 조선왕조에도 선조의 유덕함과 공로를 역대 왕들과 비교하여 설명하는 용비어천가를 편찬하였다. 세종대왕의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太宗에 이르는 六代의 행적을 영웅적인 행위로 서술하고 왕조창건의 위대함을 노래한 서사시로 총 10권으로 편찬되었다.

        세종 27년 4월 정인지, 권제, 안지 등이 六祖의 행적을 한글과 한시 125章의 노래로 적어 찬진하였으며 세종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고 이름을 내리고 판각토록 명하였으며 1443년 훈민정음 창제 후 글을 반포하기 전에 실험해 보기 위해 최초의 한글로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일부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제1장 : 해동에 육용이 날으시어 하신 일마다 天福이시니 옛날 聖人의 사적과 부절(符節)이 꼭 일치하시니……

○제2장 : 뿌리가 깊은 나무는 강한 바람에도 움직이지 아니하니 꽃도 좋고 열매도 많이 맺나니……

○제125장 : 千世 옛날부터 미리 정하신 漢水北에 누인이 개국하시어 복년(卜年)이 끝이 없으시니 聖神이 이으셔도 경천근민(敬天勤民)하셔야 더욱 굳으실 것이외다……

 

   (6) 《훈민정음》과 해례본

        이 책은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正音 : 글자)을 1446년(세종 28년) 정인지 등이 세종의 명에 의하여 설명한 한문해설서로서 全卷 33章 1冊의 목판본이다. 책이름을 한글 글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고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훈민정음 해례본〉또는〈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1940년 경 경상북도 安東 어느 고가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으며 國寶 제70호로 지정되어 현재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소장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어제문(御制文) 본문…세종 어제문과 훈민정음(새글자)의 음가(音價) 및 운용법(運用法)을 밝힌 예의편(例義篇)이 本文처럼 되어 있다.

"우리나라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서 漢字와는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나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② 해례(解例)…정음을 해설한 해례편(解例篇)이 제자해(制字解), 초성해(初聲解), 중성해(中聲解), 종성해(終聲解), 합자해(合字解), 용자례(用字例)의 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序文의 내용을 보면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목적), 훈민정음 창제자, 훈민정음의 우수성, 이 책의 편찬자, 편찬년월일 등이 기술되어 있었다.

ⓐ 이 서문에서는 표기수단을 갖지 못하는 비지식층의 백성들에 표기(표현)수단을 가지게 할 목적에서 ⓑ 세종대왕께서 친히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창제자를 밝혔고 ⓒ 이 책의 편찬자는 정인지를 비롯하여 집현전 응교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수찬 성삼문(成三問), 돈녕부주부 강희안(姜希顔), 집현전 부수찬 이개(李塏), 이선노(李善老) 등 8명의 學者들이라고 하였다. ⓓ 이 책의 序文을 쓴 날이 1446년(세종 28년) 「九月上澣」으로 되어있는데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 책은 정음(正音)에 관하여 정식으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서 우리 民族文化史的인 面에서 큰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世界文字史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7) 고려사(高麗史)

        1449년(세종 31년:54세) 高麗史全文이 고려말기 기사에서 태조 선대로부터 태조에 이르는 기록이 빠진 것과 또 역사편찬이 공정치 못하다는 의견들이 있어 세종 31년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고려사 개찬을 명하여 1451년(문종 원년)에 編年體의 방침을 바꾸어 紀傳體의 《高麗史》를 편찬하였으며 총 139券이다.

 

   (8) 고려사 절요(高麗史節要)

        1452년(문종 2년:57세), 기전체로 편찬된 고려사가 편찬된 후에도 종전의 편년체 고려사의 필요성이 있어 편년체 고려사 편찬에 착수하여 1452년(문종 2년) 고려사절요 총 35권을 완성하였다.

 

   (9) 역대병요(歷代兵要)

        1455년(세조 1년)에 정인지가 이석형 등과 함께 간행한 책으로 중국 상고로 부터 조선 태조까지의 전쟁사, 병술 등을 모아 기록한 군담집(軍談集)이며 國防에 관한 참고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10) 왕조실록(王朝實錄)

        조선초기 역대 왕조의 실록 중 〈태조실록〉부터 시작하여 정종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총감수를 담당),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에 이르기까지 8代實錄 편찬에 직접 참여하거나 감수를 담당하여 조선초기 王朝史를 編年體로 편찬하였으며 조선사 연구의 최대 史書 자료이다.

 

   (11) 학역재집(學易齋集)

        公의 저서로서 주옥같은 詩, 文學 등을 엮어 담은 〈學易齋集〉이 있었으나 여러차례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고 그 이름만 남아 있으니 애석한 일일 뿐이다.

        위의 기록에서 자료를 찾고 모으는 과정에 그 훌륭한 業績들이 멸실, 도는 많이 유실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 후손들은 先祖의 遺德과 가르침 속에서 그 業績 찾기와 발굴작업 그리고 保存에 관하여 다시한번 각성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문성공파종중에서 추진하고 있는 「文成公墓域聖域化事業」 그리고 다음 단계로 「文成公 精神文化의 선양사업」이 추진하여야 할 단계라고 생각한다.

 

3. 문성공파의 현황개요

 

文成公께서는 五子를 두었는데 광조(光祖), 현조(顯祖), 숭조(崇祖), 경조(敬祖), 상조(尙祖)의 五兄弟가 모두 높은 관직(官職)에서 國家에 봉사(奉仕)하였다. 이것은 우리 鄭門의 全盛期로 기록될 것이며 문성공으로부터 600여 년의 명문종통(名門宗統)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명문거족임을 증거하는 자료는 문성공의 족보발간사(族譜發刊史)가 立證하고 있으니 1709년 기축세보(己丑世譜)로부터 시작하여 2006년 병술족보(丙戌族譜)에 이르기까지 10回째 족보를 발간하여 명실상부한 명문거족임을 자부하게 된다.